신군부에 맞선 선지자, 교회개혁 ‘깃발’… 한국교회 변화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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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미션 어워드] 존경받는 원로목회자상 받은 박조준 원로목사

박조준 목사는 국민일보가 주관하는 ''2023 국민미션어워드''에서 존경받는 원로목회자로 선정됐다. 박 목사가 국제독립교회연합회 목사안수식에서 후배 목회자들을 향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제공

박조준 목사는 국민일보가 주관하는 ''2023 국민미션어워드''에서 존경받는 원로목회자로 선정됐다. 박 목사가 국제독립교회연합회 목사안수식에서 후배 목회자들을 향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세상의 찬사와 권력자들의 구애 앞에서 예언자적 설교자의 삶을 보여준 보기 드문 설교자입니다.”

지난해 열린 제1회 웨이크신학포럼에서 발제자로 나선 정장복 한일장신대 명예총장이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설립자인 박조준(89) 갈보리교회 원로목사를 이렇게 소개했다. 박 목사는 군부 정권 시절 옳은 말 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용기 있는 목회자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을 정면으로 비판했고 전두환 대통령을 위한 기도회 참석이나 동행해 달라는 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예언자적 행보는 그를 위기로 몰아갔지만 그럴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계기가 됐다. 묵묵히 목사로 살며 교회를 세우고 후학을 길렀다. 개혁의 목소리를 내며 한국교회의 변화를 이끈 것도 그의 중요한 사명이었다.

이런 공로로 박 목사는 지난달 25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에서 열린 제12회 국민 미션 어워드에서 ‘존경받는 원로목회자상’을 받았다. 박 목사는 지난 1일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목회자 박조준’을 만든 성장 배경과 60여년 목회 여정을 털어놓았다.

신앙 자유 찾아 남한으로


1934년 평안남도 강동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박 목사는 청소년 시절까지 북한에서 신앙생활 하며 성장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박 목사의 가족은 남한으로 피란을 결정했다. 1·4후퇴 때 박 목사는 남한으로 피란했다.

박 목사는 “남한으로 온 건 공산주의자들의 무신론 철학과 이를 통한 공산주의 통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기독교에 대한 핍박을 목격하고 신앙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으로 왔다고 한다.

할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했던 박 목사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철저히 실천했고 부흥사경회에 참석해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고 복음 사역에 헌신하기로 다짐했다”고 회상했다.

남한에 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어린 시절 결심한 목사가 되기로 했다. 신학교에 진학하기에 앞서 서울대 종교학과로 진학했고 이후 장로회신학대 전신인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1960년대 초 신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영등포구에 영은교회를 개척하고 본격적으로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교회에서 6년 동안 사역한 박 목사는 “북한이 일으킨 6·25전쟁을 피해 남한에 온 피란민들의 상처와 실향의 아픔을 위로하고 격려했던 시간”이라고 기억했다. 교회는 부흥했다. 그러던 중 한경직 목사의 부름을 받고 1966년 영락교회 부목사로 부임했다.

좌절하지 않았던 이유, 십자가


1973년 한 목사가 은퇴한 뒤 박 목사는 39세에 영락교회 담임목사가 됐다. 영락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삶의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근면하고 정직하며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신앙인을 양성하는 일에 중점을 뒀다.

박 목사는 사역지가 어디든 최선의 노력을 다했던 목회자였다고 자부했다. 교회 부흥과 더불어 명설교가로 이름을 떨치게 된 비결도 이런 노력이 바탕이 됐다. 하지만 그의 올곧은 신앙은 신군부와 사사건건 부딪히다 미운털이 박힌 채 1984년 ‘외화밀반출’이라는 조작된 사건을 겪으며 영락교회 담임목사직을 내려놓게 됐다.

담임목사는 그만뒀지만 하나님과의 약속인 목회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이듬해 서울 강남구에 갈보리교회를 설립했다. 박 목사는 이 교회에서 18년 동안 목회하면서 교회를 부흥시켰다. 박 목사는 자신의 목회 철학을 ‘갈보리 십자가의 정신’이라고 말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을 언급한 박 목사는 “구세주 예수께서는 인간의 죄와 함께 모든 얽매인 것들을 다 풀어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라며 “이 진리 안에서 성도들이 기뻐하며 행복하게 주님을 섬기고 자유롭게 살도록 전심으로 도왔던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68세가 되던 해 조기 은퇴한 그는 후임 목사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은퇴한 다음 날 곧바로 미국으로 떠났다.

광야에서 개혁을 외치다


그는 교회 개혁에도 힘썼다. 개혁의 출발점은 교회 정치의 변화였다. 한국의 전통적 장로교회의 특징이던 조직화 되고 제도화된 모습에서 벗어나 초교파적인 독립교회를 지향했다. 세속화되고 교권화된 한국교회 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중심에 서는 교회 정치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교회 개혁을 위한 열정은 1995년 뜻을 같이하는 145개 지역 교회 목회자들과 더불어 ‘독립교회연합회’를 발족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1998년에는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KAIKAM)’를 만들었다. 그는 카이캄의 초대 회장을 맡아 봉사했다.

박 목사는 목사안수를 위해 별도의 목회자 양성기관을 설립하면 이것만으로도 특정 교리에 한정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염려가 컸다. 이런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 신학교를 통한 직접 양성 대신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갖춰진 목사 후보생 중 교회 개혁의 뜻에 공감하는 이들만 구별해 목사로 안수했다. 이를 통해 교회 개혁의 후계자들을 지속해서 배출하게 됐다.

연합회의 효과적인 운영을 위해 참여한 모두에게 자율권을 부여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연합회의 주도권 문제와 더불어 불법적 운영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 목사는 2011년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협의회와 결별하고 2013년 ‘국제독립교회연합회(WAIC)’를 새롭게 발족했다.

박 목사에게 교회개혁은 교권을 기반으로 한 교단의 인위적인 정치개입을 억제하는 게 출발점이다. 이어 성령의 은사가 발휘되는 자유로운 목회 풍토를 조성해 정의롭고 평화로운 교회 정치를 실현하는 데 있다.

성경을 들고 서 있는 박 목사.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제공
성경을 들고 서 있는 박 목사.



다음세대가 희망이다


박 목사는 신학교 등에서 특강이나 설교를 한 적은 있지만 교수로서 신학 강의나 신학생 양성에 참여한 적은 없다. 하지만 평생 쌓아온 목회 사역의 경험과 이를 바탕으로 한 노하우를 후배 목회자들에게 기꺼이 전수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목회 현장에서 은퇴했지만 2001년부터 ‘세계지도력개발원’을 설립해 후배 목회자를 돕는 목사 재교육을 시작했다. 세계지도력개발원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미국에서 문을 열었다. 이곳을 거쳐 간 목회자의 수는 현재까지 4만명을 넘어선다.

세계지도력개발원의 여러 프로그램 중 ‘목회 나눔’이 대표적이다. 목회 나눔은 2015년에서 2018년까지 4년 동안 진행됐다. 해마다 15차례 이상 목회자 나눔을 진행하면서 목회자들에게 성경해석과 설교법, 목회 경험담을 전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목회 나눔은 더 이상 오프라인으로 모이지 못하게 됐다. 대신 WAIC 주관으로 ‘목회 레슨’이라는 이름으로 온라인 교육으로 전환해 후배 목회자들을 계속해서 만나고 있다.

박 목사는 “언제나 한국교회와 목회자를 위하는 마음이 식지 않은 채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다”며 “하나님이 건강을 주실 때까지 온·오프라인의 경계를 허물고 왕성한 교육 활동을 통해 한국교회를 개혁하는 일을 쉬지 않고 계속해 나가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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