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전쟁 속에서도 피어난 성경적 교육을 통한 미래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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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사이버신학원 릴레이 특강] 정일웅 교수의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 <1>


체코의 화가 구스타프 시코라가 그린 코메니우스의 초상화. 체코 프라하 코메니우스교육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웨이크사이버신학원 제공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에 대해서는 대부분 알고 있다. 반면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는 낯설다.

형제연합교회는 루터보다 100년 앞서 보헤미아(현 체코)에서 종교개혁을 부르짖다 순교한 얀 후스(1369~1415)의 후예들이다. 코메니우스는 루터 종교개혁 이후인 1592년 보헤미아에서 태어났다. 이후 형제연합교회의 목사이자 마지막 감독을 역임했다. 30년 종교전쟁(1618~1648)에 의한 로마 가톨릭의 박해 속에서 일생 망명 생활을 했던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가 한국교회에 남긴 교훈은 상당하다.

코메니우스가 살았던 17세기 유럽은 시대의 전환기였다. 가장 큰 충돌은 종교개혁 지지세력과 그것을 막으려는 반종교개혁 세력 사이에 벌어진 30년 종교전쟁이었다. 코메니우스는 분열과 대립이 반복되는 전쟁을 경험했다.

전쟁은 조국 보헤미아에서 시작됐다. 1618년, 그는 형제연합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풀넥의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1621년 로마 가톨릭의 박해가 시작되면서 형제연합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피신했다.

그동안 코메니우스는 아내와 두 아이가 흑사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쓰라린 아픔을 딛고 1623년 ‘세상의 미로와 마음의 천국’이란 책을 발표한다. 책은 체코인들이 요즘도 즐겨 읽는 고전 문학서 중 하나다.

1628년 황제는 코메니우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명령한다. 더이상 고국에 살지 못하게 된 그는 동료들과 폴란드로 망명해 리사에 터를 닦는다. 망명지에서는 교사로서 인간교육 방법을 연구해 여러 권의 책을 출판했다.

1630년대 후반, 코메니우스는 교육철학의 핵심을 담은 책 ''''범지혜의 선구자''''를 영국에 있던 친구 하르트립을 통해 출판했다. 이 책으로 유럽 지성사회의 주목을 받게 됐고, 여러 나라의 초청을 받았다. 모두가 코메니우스를 통해 대학 설립과 학교 개혁을 시도하려 했다. 영국 프랑스 스웨덴은 물론이고 1636년에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총장을 제의했다.

코메니우스는 형제연합교회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영국 의회의 초청으로 런던에 간 일이 있었다. 하지만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내전이 발생해 아무런 일을 하지 못한 채 귀국한다. 이때 쓴 ‘빛의 길’은 1668년 영국 왕립학술원에 헌정됐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당시 코메니우스는 영국 청교도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경건 운동을 독려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코메니우스는 유럽의 시대변화를 직시하면서 어떻게 성경의 진리가 인류를 구원으로 인도하며 무너진 유럽 사회를 기독교 사회로 회복시킬 수 있을지 숙고했다. 새롭게 생겨나는 이성적 사고에 따른 인문주의와 자연과학의 발전과도 대립하지 않으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위치가 새로운 사고의 중심에 서 있게 해야 할지도 고민했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이 다시 모든 학문의 중심이 되게 할 방법을 고민했던 인물이었다. 창조세계 전체를 통찰하는 학문적 방법의 착상과 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전인성 회복을 위해 교육의 참된 방법을 갈구했다. 그 시대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새로운 학문적 체계를 꿈꿨다. 반종교개혁 세력의 계속된 박해 속에서 형제연합교회를 이끌면서 여전히 그리스도를 통한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붙잡았다. 그러면서 신앙의 자유를 누릴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고대했다.

유감스럽게도 1648년 30년 종교전쟁을 종결하는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은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가 그토록 소망했던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유럽 사회에서 퇴출당하는 절명의 위기에 직면한다.

형제연합교회는 해산해야 했으며 감독직도 내려놓아야 했다. 잠시 헝가리 사로스파탁으로 망명처를 옮겼으나, 거기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마지막 망명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향한다.

그곳에서의 14년은 패자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는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끝까지 교육을 통한 인간성과 신 형상 회복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희망은 폐허가 된 유럽을 기독교사회로 다시 회복시키려는 개혁방안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교육계획을 구현하는 데로 발전한다.

그는 새로운 경건 운동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연합해 형제연합교회가 이루지 못했던 완전한 유럽 사회를 만들길 바랐다. 지성인과 정치인, 교회 지도자들에게 전하는 호소문을 썼다. 호소문은 7권으로 구성된 미완성 작품에 실렸다. 그리고 1670년 암스테르담에서 생을 마감한다.

1935년 코메니우스의 미완성 대작이 발견됐다. 이는 그를 다시 주목받는 인물로 만들었다. 1966년 국제코메니우스학회가 설립되면서 그의 작품이 전 세계에 더욱 많이 알려졌다. 코메니우스는 17세기를 이끈 교육자이자 철학자, 신학자로 새롭게 평가됐다.

암스테르담시는 코메니우스를 기리기 위해 그의 무덤을 기념관으로 단장해 관광명소로 만들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그는 교육신학자로서 모든 민족에게 존경받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정일웅 교수
약력=총신대 신대원 교수 및 총장 역임. 현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 웨이크사이버신학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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